본문 바로가기
인테리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이상도시

by 카링이 2022. 8. 11.

브로드 에이커 시티 계획의 실패

브로드에이커 시티라는 모델을 발표하고 5년이 지난 후, 1940년에 피츠버그의 현대 미술 박물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별 다른 수정이 없이 다시 전시회를 엽니다. 이 해에는 디트로이트 중 한 그룹이 후원을 하면서 작은 규모의 25개 가구로 그의 이상 도시 계획을 실현해볼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범 하우스(Berm House)라는 이 이름의 계획은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지는 못하면서 시작한 지 2년 만인 1942년에 결국 미완성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다음 해인 1943년에는 듀이(John Dewey), 미이스(Mies van der Rohe),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록펠러(Nelson Rockfeller), 사 리넨(Eliel Saarinen) 등이 동참하면서 브로드 에이커 시티 계획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대정부 철원서를 제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후, When Democracy Builds(1945) 그리고 The Living City(1958)에서 어느 정도 다듬는 선에서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브로드 에이커 시티는 실현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이상향에 대해 총 정리한 'Living City'라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이 계획은 단순하게 물리적으로 세운 계획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과 이상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그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2년에는 The Disappearing City 부터 시작하여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58년 The Living City까지,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그가 진정하고 싶었던 말을 담고 있습니다. 

 

대도시는 반드시 지금과는 달라져야 하며, 미국을 폭 민주의(Mobocracy)에서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충분한 토지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지 못한 공업적인 대도시는 근본적으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업은 위대하기는 하지만 이 산업을 중심으로 해서는 민주주의의 목표는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위대한 농민으로서의 재능을 살려 공업과 농업 둘의 균형을 잡아야만, 민주적이고 유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그의 저서인 'Genius and the Mobocracy'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워드의 전원도시
하워드의 전원도시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브로드 에이커 시티와 하워드의 전원도시

이상 도시 계획들 중에 브로드 에이커 시티와 전원도시는 자주 비교가 되곤 합니다. 이 둘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은데요. 브로드에이커 시티와 전원도시 모두 도시와 농촌을 통합하고 밀도를 낮추고 분산을 하게 합니다. 

 

브로드 에이커 시티는 전원도시와 마찬가지로 분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전원도시와는 달리 어떻게 보면 극단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워드의 전원도시는 분산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워드는 도시와 농촌을 결합한다고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의 계획을 보면 여전히 도시와 농촌이 분리되어있습니다. 전원도시는 경계 속에서 도시는 여전히 중앙 집중적이며 대칭적이고 집약주의적입니다. 

 

이와는 달리 라이트의 브로드 에이커 시티에서는 도시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도시를 지배한다는 개념이 없으며 보다 친환경적으로, 자연이 인간의 세계에 결코 밀려나지 않습니다. 브로드에이커 시티에서는 도시와 농촌이 분리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분산하는 것은 하워드도 고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워드는 세기의 전환점에서 도시 내에 있는 철도와 운하들로 굉장히 복잡한 수송 네트워크가 생길 것으로 생각했지만 라이트의 브로드에이커 시티에서 처럼 모노레일, 자동차 등에 대한 것은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전원도시는 철도시대에,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초기 자동차 시대에 있습니다.

 

라이트는 자동차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 있는 전제조건으로 자동차가 있어야 새 도시를 건설할 시간과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자동차가 없었다면 라이트는 밀도가 극도로 낮은 이 도시를 고안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산업 기술이 있어야 이 도시계획 디자인에 있어서도 전에 없는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워드의 경우에는 세계를 변화하는 원동력으로 서로 간의 협동을 중시했지만, 라이트의 경우에는 그러한 노력보다는 상상력의 호소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워드는 지원자들의 다양한 제휴를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라이트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이상향을 완성하는 데에 몰입했습니다. 라이트는 '지금 바로 이용할 수 있는 계획을 만드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하워드는 지금 바로 이행할 계획을 세운 것이고, 라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보다 더 미래에 있으면 좋을 이상적인 도시의 예시 모형을 완성하는데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외에도 산업화를 중심으로 밀도가 높은, 효율적인 도시를 구상한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와도 비교해볼만 합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이상 도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현대 건축의 거장으로써 건축 유산들을 남긴 데다가, 그의 아이디어와 낭만적인 생각들로 이상적인 도시에 대한 계획을 남겼습니다. 이 아이디어의 바탕이 된 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자연의 섭리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건축사상과 그가 오랜 시간 구상한 이상적인 새로운 세계를 모두 합한 것이 바로 브로드 에이커 시티 계획안이었습니다. 다른 이상도시들과 달리 그의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도시 내의 여러가지 세세한 부분들을 직접 설계하고 구상했습니다. 하지만 설명이 구체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의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 낮은 인구밀도, 기계문명에 과하게 의존한다는 점, 사회체제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점, 그리고 도시 내부의 세세한 점까지 모두 규정을 해 버린 것이 비난의 이유였습니다. 그의 건축 작품들은 위대하고 아름답고 독창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너무 이상적인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들이 미친 영향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브로드에이커 시티(Broadacre City : A New Community Plan)

브로드에이커 시티 라이트에게 1920년대는 굉장히 힘든 시기였습니다. 사적인 이슈로 인한 언론의 비난과 탈리에신에서의 화재사건, 그리고 어머님의 죽음이라는 시련이 계속해서 이어졌던 시

interior-info.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