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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현대 건축 디자인의 새로운 바람, 르 코르뷔지에

by 카링이 2022. 7. 30.

 

이제 막 인테리어 쪽에 관심을 가지고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건축가분들부터 정리하면서 시작하려고 해요. 첫 번째는 현대 건축 디자인의 새로운 바람이었던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 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1965)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혹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라는 이름의 스위스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활동한 건축가 겸 작가입니다. 현대 건축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30대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고 하네요.

현대 디자인에서 특히 이론적 연구에서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밀집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50여 년 동안 활동을 했으며 인도, 러시아, 유럽에 자신의 건물들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에도 하나씩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다재다능하여 화가, 조각가이면서 가구 디자이너이기도 했습니다.

 

 

유년 시절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의 서북부에 있는 뇌샤텔 주에 있는 프랑스 국경에서 500km가 떨어져 있는 쥐라 산매게 있는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라는 이름으로 출생했습니다. 이곳에서 프뢰벨 교육법이라는 교육을 채택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시각 예술 분야에 매료되었고,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부다페스트와 파리에서 공부를 한 선생님 샤를 레플라트니아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미술학교에 있던 건축 교사는 르네 샤팔라라는 건축가로 르 코르 뷔지에의 초기 주택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기존에 살던 지역과는 많이 다른 유럽 곳곳을 여행했습니다. 1907년 즈음 파리로 넘어가 프랑스의 철근 콘크리트의 고수였던 오귀스트 페레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습니다. 1910년 10월, 1911년 3월 사이에는 베를린 근처에 있는 건축가 페터 베렌스 아래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그리고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독일어를 익혔다고 합니다. 이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중요한 기반이 되어주게 되었습니다. 1911년에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그리스, 터키를 방문하는데요. 여기에서 본 것들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자신의 저서인 '건축을 향하여'에서는 파르테논 신전을 그린 스케치와 함께 그 디자인을 칭송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경력 (1914 ~ 1930)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모교인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파리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4년 동안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현대적인 기술들을 활용해 건축의 이론 연구를 했습니다. 그중에는 '돔-이노' 주택 계획안도 있었다고 하네요. 이 모형을 통해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최소한의 숫자만을 사용해 모서리에서 지지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했고, 평면의 한 쪽에서 각각의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가지고 있는 슬라브로 구성이 되어있는 콘크리트 슬라브로 개방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 구상했습니다.

 

이 설계를 기초로 삼아 이후 10년간 대부분의 건축 설계를 합니다. 사촌인 피에르 잔레와 함께 건축 실무를 시작했고 1940년까지 동업을 계속합니다.

 

1918년에는 입체파 화가인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작품에 녹아있는 부분들을 보고 서로 공통된 관심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오장팡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권유하고 함께 공동 작업도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들은 입체주의를 버리고 '입체파 이후'를 출간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주의'를 부르게 됩니다.

 

 

블록으로 만든 Maison Citrohan, 출처는 사진에 기재

 

두 번째 이름 (1920)

1920년에 드디어 르 코르뷔지에 라는 이름으로 첫 기사를 작성합니다. 이 필명은 외할아버지 이름을 변형한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변형하고 다시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는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하기보다는, 순수주의와 회화 쪽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1922년부터 파리 세브르가 35번지에 작업실을 새롭게 엽니다.

 

그전에 있었던 이론적 연구들은 주택 모형들로 이어집니다. 그중 시트로앙 주택(Maison Citrohan)은 프랑스에 있는 자동차 회사인 시트로엥의 말장난이기도 한데요. 주택을 만들 때 들어가는 현대 산업 방식들과 마감재들을 꼽은 것이었습니다.

 

이 주택에서 두 층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거실, 그리고 2층에는 침실 3층에는 부엌을 배치하는 3층 구조를 고안합니다. 지붕 위에는 햇빛을 볼 수 있는 테라스를 배치합니다. 건물 외부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계단을 설치해 곧바로 2층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건물은 직사각형이며 창문이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요. 하얗게 색칠된 공간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내부 공간은 관 모양을 한 금속 마감 가구들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조명 또한 장식이 없는 전구를 사용했습니다. 내벽 또한 외부처럼 하얗게 마감합니다. 1922년부터 1927년 사이에 파리에서 많은 개인 주택들을 설계합니다. 파리 근교에 불로뉴 비양쿠르, 파리, 플라넥스 주택., 라로슈/알베르 잔레 주택 등을 설계합니다.

 

그리고 1930년 프랑스 시민권을 갖습니다.

 

 

Plan Voisin

 

도시계획

몇 년 동안 프랑스는 파리에 빈민가가 늘어가는 것에 대처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이러한 주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는데요. 자신의 모던한 건축 형태가 하층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1922년에 한 기획인 Immeubles Villas는 세포처럼 모여있는 공동 주택들을 제시합니다. 거실, 침실, 부엌 그리고 정원 테라스를 가지고 있는 주택입니다. 주거 집합 건물을 설계하고 다음으로는 전체 도시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요. 1922년에 300만 명의 주민을 채울 수 있는 현대 도시(Ville Contemporaine)을 계획합니다.

 

이 계획은 십자 모양의 60층 건물들의 모임입니다. 각 건물들은 유리 커튼 월로 둘러싸인, 지금의 사무용 빌딩과 같은 모습인데요. 직사각형 모양의 공원과 같은 넓은 녹지와 함께 만들어지게 됩니다. 한가운데에는 교통의 중심이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는 기차역, 버스 터미널, 공항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1925년에는 유명한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후원을 받아 부아쟁 계획(Plan Voisin)을 전시하게 됩니다. 세느 강의 북쪽인 파리 중심부는 대부분 밀어버리고 십자형의 60층 고층건물을 배치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그의 디자인에 있는 발상에는 호의적이었지만 계획안에는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계획안은 그 당시에 있었던 불결한 도시에 대한 대처방안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1930년에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도시계획에 살을 붙여 1935년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도시에서 주택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아니라 가족의 숫자에 따라서 배치가 되는 것으로 구상한 내용입니다. 이후 도시계획 위원회에 들어가 알제와 다른 도시들을 설계합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각지에서 도시 계획안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가장 유명한 곳을 꼽자면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이 있습니다.

 

 

사망

1965년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프랑스의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서 수영을 하러 갔다가 사망합니다. 시신이 수영을 하던 사람에게 발견되었고, 사망 진단을 받습니다. 77세의 나이였으며 심장 발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망은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린든 존슨은 "전 세계적인 그의 작품들은 우리 역사상 희귀한 예술가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특성들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라고 말했으며 소련에서는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큰 위인을 잃었다.", 일본은 도쿄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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