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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르 코르뷔지에의 새로운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 정리

by 카링이 2022. 8. 3.

새로운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

르 코르뷔지에는 빌라사부아(Villa Svoye)에서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잡지 '레스프리 누보' 그리고 그의 저서인 '건축을 향하여'에서 설명을 했었던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를 다시 분명하게 정의하게 됩니다.

 

먼저 첫번째로 르 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말하는 필로티(Pilotis)를 이용해 무게를 지탱하는 것으로 건축 구조를 땅에서 들어 올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 필로티는 주택을 짓기 전 기반을 만드는 구조적 지지물입니다. 이 지지물은 이어서 설명할 두 가지 요소를 뒷받침해 주는데요.

 

그 두 가지 요소는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따로 구조적 기능을 갖지 않는 벽으로 이루어져있는 '자유로운 입면' 그리고 벽이 없이 바닥 만으로 방들을 배치하는 '열린 평면'입니다.

 

그리고 다음인 '띠 유리창'은 빌라 사부아의 2층에 있는 '띠 유리창'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넓은 건물의 주변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요소입니다.

 

마지막인 다섯 번째는 '옥상 정원'입니다.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바닥에 있었던 녹지를 옥상 위의 정원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경사로는 지면에서 3층 높이의 옥상까지 이어져있고, 이 구조로 건축적 산책로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얀 관 형상의 계단 난간의 경우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사랑했던 '원양여객선'을 연상합니다. 반원형 통로를 가지고 있는 1층 주변에 있는 차도는 1927년형 시트로엥 자동차의 회전 반지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요. 르 코르비쥐에가 현대 공업에 대해 오마주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Maison la Roche

가구

'의자는 건축이고, 소파는 부르주아다.'

1928년에는 건축가인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가구 디자인의 실험을 시작했는데요. 사촌인 피에르 잔레도 함께 공동으로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페리앙과 함께 하기 전에는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건축 설계 이 내에서 가구를 배치할 때, 토네트에서 생산한 제품들과 같은 기성품들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토네트사는 1930년부터는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상품을 생산했습니다.

 

1928년, 르 코르뷔지에와 페리앙 두 사람은 1925년에 르 코르뷔지에가 쓴 책 '오늘날의 장식예술'에서 설계했던 가구들을 실질적으로 디자인하기 시작합니다. 이 책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유형으로서의 가구, 그리고 유형으로서의 요구, 인간의 수족인 사물 이렇게 세 가지의 가구 유형으로 봤었는데요. 그는 '가구는 우리의 팔 다리의 연장이고 인간의 기능의 연속이다. 그리고 유형으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선택과 비례, 섬세함과 조화에 의해 영속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의 협력으로 처음 만든 것은 세개의 크롬으로 도금한 관으로 만들어진 강철 의자입니다. 파리의 라 로슈 주택(Maison la Roche) 그리고 바르바라 앙리 교회(Barbara and Henry Church)의 별관에서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그리고 이 의자는 1929년 살롱 도톤에 출품했던 '주택을 위한 설비'에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밀라노의 카시나(Cassina S.p.A)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가구 디자인은 오직 카시나에서만 독점 생산할 수 있도록 계약권을 취득했습니다. 많은 복제품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카시나가 르 코르뷔지에 제단에서 유일하게 인가한 생산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Villa Stein

모뒬로르(Modulor) 체계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모뒬로르 체계에서 건축적 비례의 척도에 황금비율을 사용했습니다. 이 비율을 사용한 이유는 모뒬로르 체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그리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작업, 또 그 외의 인체의 비례를 이용해 건축의 외관, 기능을 개선하는 데에 이용했던 많은 사람들의 전통의 연속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황금비율 외에도 피보나치수열, 인체 측정학 등의 시스템을 기본으로 잡았습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의 황금 비율을 선호했는데요. 인체 모형의 키를 배꼽에서 황금비율로 맞추어 둘로 나누고, 이 나눈 구간을 황금비율에 맞추어 다시 무릎과 목에서 나누었습니다. 이 비율을 그의 모뒬로르 체계에 적용했습니다.

 

1927년에 가르슈에서 설계했던 빌라 슈타인(Villa Stein)은 이 모뒬로르 체계가 적용이 된 예시라 하겠습니다. 이 주탁은 직사각형의 평면과 입면 그리고 내부의 구조가 거의 황금비 사각형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가 설계한 또 다른 유니테 다비타시옹 또한 이 모뒬로르가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디자인 철학에 조화와 비례를 중심으로 두었고, 우주적 수학 질서에 대한 믿음으로 피보나치 수열, 황금비율에 집중했습니다. 피보나치수열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고 서로의 관계가 명확한 리듬이다. 이 리듬은 인간의 근원이다. 이 리듬들은 인간 안에서 불가항력에 따라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어린이와 노인, 학자의 황금비율의 자취를 따라간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1930년대에는 프랑스의 우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조르주 발루아와 위베르 라가르델과 함께 하며 생디칼리즘 잡지인 '프렐뤼드'의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34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의 초대로 로마에서 건축을 강의했습니다. 또한 비시 정권에서 도시계획 관련 공직을 알아보고 도시계획 연구 위원회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그의 계획안이 채택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정치와 멀어지게 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세기의 프랑스에서 있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생시몽, 샤를 푸리에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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